1980년 5월 18일은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신군부가 광주에서 학살로서 쿠데타를 완성한 날이다. 그해 바로전인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는 군부를 장악하기 위하여 반란을 도모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비롯하여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도방위사령관을 체포하여 쿠데타의 서막을 열었다.
1936년 7월 17일 이베리아 반도인 스페인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스페인의 식민지인 아프리카의 모로코 주둔군의 젊은 장교들은 군부대와 행정기관을 접수했고 그 다음날 카나리아 제도의 방명군 사령관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반란을 선언했다.
파시스트 프랑코는 가톨릭교회와 결탁하여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도움으로 북아프리카 스페인령의 주둔군을 움직여 2년간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자행하여 스페인을 점령 후 철권통치를 시작했다.
80년 학살을 통해서 집권한 전두환 일당은 먼저 자신들의 피 묻은 손을 감추기 위하여 국민 인기영합정책인 소위 포퓰리즘의 정책을 쓰기 시작했으며 그 일환으로 그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야구의 프로화를 추진하게 이르렀다.
철저히 배타적인 지역 프랜차이즈를 도입한 프로야구는 부산·경남을 연고하는 롯데와 대구·경북의 삼성 그리고 충청지역을 연고로 OB, 호남을 연고지로 하는 해태 경기·인천·강원을 연고로 하는 삼미, 서울을 연고지로 하는 MBC 등이 창단되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그의 정치적 스승 박정희가 박스컵이라는 축구를 통해서 우민화정책을 썼듯이 그도 스승을 능가하는 청출어람으로 야구의 프로화를 통하여 철저히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는 우민화 정책으로 국민을 기만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프로야구는 팀의 재정이나 그리고 선수수급, 선수 레벨 등 모든 면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와 해태 타이거즈는 꼴찌 후보였으며 전문가들 예상을 뒤엎지 않고 두 팀이 나란히 6위와 5위를 기록했다.
프로야구의 원년은 이렇게 두 팀이 꼴찌를 다투었으며 미국에서 역수입해온 트리플A급 박철순은 22연승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 OB베어스를 원년 우승팀으로 만들어 버렸다.
스페인 북동부 카탈루냐 지방에 자리 잡은 바르셀로나는 원래 독립국이었다. 그러나 12세기 아라곤왕국에 병합된 이래 끝없이 자치 정부를 수립을 꿈꾸어 왔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의 염원은 실패했다.
광주가 그랬던 것처럼 바르셀로나는 저항의 도시였다. 12세기 스페인 왕국에 병합된 이래 끝없이 자치와 독립을 추구해 왔으며 그들은 카탈루냐 지방의 수준 높은 문화와 고유의 언어를 간직한 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으며 일찍이 상업과 무역으로 번성한 도시답게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살아 왔다.
그런 바르셀로나는 스페인내전 때 파시스트 반란군 프랑코에 대항하여 공화국 수도로서 그리고 헤밍웨이, 조지오웰 등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결사체인 국제여단의 정치적 고향으로 그 중심에 섰으며 1939년 부르고스 정부의 수반인 프랑코에게 함락될 때까지 최후까지 항전했던 기개와 정의 그리고 저항의 도시였다.
레알 마드리드 열혈팬이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라이벌 FC바르셀로나 구단주인 수뇰을 내전 중에 암살시켰으며 또한 대지주와 가톨릭과 결탁한 프랑코는 풍부한 자금으로 레알 마드리드에게 엄청난 지원을 통해서 스페인 내 최강의 팀으로 만들었다.
재정과 국가지원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FC바르셀로나는 스페인리그에 하위권을 맴돌았으며 2002년 월드컵 이후 우리나라 이천수선수가 진출하여 실패한 바스크 지방의 한을 품은 레알 소시에드에 조차에도 밀리는 초라하고 참담한 팀이 되어있었다.
마드리드는 승승장구했고 독재자 프랑코는 그런 마드리드에서 옛 무적함대의 영광을 보려고 했으며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귀족이 명품을 사들이듯 유명선수를 사서 스페인 내에서 절대강자로 군림했다.
세계축구계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조국 네덜란드에 월드컵 준우승을 안겨주었던 요한 크라이프는 독재자 프랑코가 사고 싶은 명품 중에 명품으로 끝없는 구애를 받았으나 “독재자가 지원 팀에서 뛸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하고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열열한 환호를 받으며 FC 바르셀로나에 입단하여 독재자 프랑코가 지켜보는 가운데 레알 마드리드를 5:0으로 격침해 버렸다.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자 올림픽을 유치했던 히틀러는 유태인과 유색인종을 극도로 싫어했기에 흑인들이 우수한 성적을 내는 것에 대해서 극도의 저항감을 가졌으나 1936년 히틀러가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의 흑인 육상 선수인 제시 오웬스는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100m, 200m, 400계주 그리고 멀리뛰기의 네 종목의 올림픽 챔피언이 되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여 히틀러는 수상을 거부하고 퇴장하는 볼썽사나운 꼴을 연출했다.
프랑코도 자신의 친구이자 동지인 히틀러와 같은 치욕을 요한 크라이프의 FC 바르셀로나를 통해 겪었으며 요한 크라이프는 20년 후 감독이 되어서도 다시 레알 마드리드를 5:0으로 물리치는 바르샤의 영웅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세월은 흘러 우리의 영웅 황영조는 1992년 몬주익의 언덕을 넘어 바르셀로나 주경기장에 가장 먼저 들어옴으로서 그의 선배 손기정선수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42.195km 달려서 1착으로 결승선을 통과해야 했던 아픔을 씻었다.
전두환 일당에 의해서 1982년도에 출범한 프로야구는 고교야구의 인기를 등에 업고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정치적 무관심을 위해서 만들어진 프로야구는 오히려 광주구장에 ‘목포의 눈물’과 ‘비 내리는 호남선’을 울려 퍼지게 했으며 6월항쟁 중에는 광주구장과 잠실구장에서 이름조차 잃어버려서 재야 정치인으로 소개되었던 “김대중”이 연호되기 시작했다.
이제 야구장도 서울의 명동과 부산의 서면 그리고 광주의 금남로처럼 최루가스가 뿌려지기 시작했고 TV로 중계되던 스포츠 중계는 예고 없이 중단되기 시작했으며 전두환의 의도도 프랑코의 의도처럼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최악의 재정과 가장 적은 선수단을 가진 해태 타이거스는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한국 프로야구를 제패하기 시작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광주시민들은 캄캄한 겨울 광화국속에서도 자신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살아 남은자의 회한을 담아 야구에 혼을 불어 넣기 시작했으며 광주의 아픔을 잘 아는 선수들은 똘똘 뭉쳐서 호남민의 민심을 배반치 않았다.
스포츠를 가리켜서 투자한 만큼 성적을 낸다고 했다. 그러나 재정이 열악한 해태 타이거스는 최강이었다. 특히 한국시리즈 등의 단기전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전문가들은 그런 해태 타이거즈를 가리켜 근성의 팀이라고 했으나 나는 그리 보지 않는다.
해태 타이거즈 근성은 광주민중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진혼굿이었다. 표출할 수 없는 분노와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치욕을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은 알고 있었기에 미친 듯이 치고 달려야 했다. 그것이 성적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85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리고 그는 마드리드 계곡에 묻혔다. 아이러니컬하게 그의 거대한 무덤은 공화국 정부의 가치를 위해 복무하다 투옥당한 1200여명의 노역에 의해서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36년간 프랑코의 독재정권에 시달린 스페인 국민들은 프랑코를 묻는 관위에 커다란 바위를 올려놓고 프랑코를 매장했다고 한다.
프랑코의 관위에 바위를 누르고 묻은 이유는 “프랑코 같은 독재가 태어나지 말라”는 뜻으로 스페인 국민들이 얼마나 프랑코의 저주했는지 그 단면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코가 죽은 지 4년 후 1979년 10월 26일 한국의 독재자도 유명을 달리했다.자연사가 아닌 자신의 부하에게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거세당했다. 그리고 그는 이 땅을 지키고자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선열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에 아주 편하게 잠들어 있으며 유신잔당들이 제사 때가 되면 그를 추모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 땅의 주류언론들이 그를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연일 미화시키고 있다.
또한 그의 딸 박근혜는 아버지가 갈취하고 빼앗은 재산으로 이루어진 정수장학회라는 천문학적 재산을 가지고 있으며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제1야당의 대표가 되었으며 탄핵 때 무너져가는 한나라당을 눈물로 구하였으며 이번 5·31지방선거에서 전국적으로 압도적 승리를 이끌어 내어서 유신잔당과 친일후손들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독재자 프랑코의 딸 역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재단’을 만들어 자신의 아버지를 추모한다고 난리이며 남아있는 파시스트 잔당을 규합하여 아버지의 공과를 논하자고 설치고 다니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피는 못 속이는 법이며 그 애비에 그 자식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한 행동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판박이다.
그리고 수천억의 비자금을 조성하고서 단돈 29만원 밖에 없다는 살인마 전두환이나 지애비가 친일하고 쿠데타하여 남의 재산을 강탈하여 모은 재산을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모았다고 강변하는 생물학적 여성 정치인의 강변 속에서 박수치는 국민들이 있는 한 아직도 민주주의는 현재 진행형인지 모른다.
FC 바르셀로나가 축구를 통하여 카탈루냐 지방의 한을 풀어준 굿판이었다면 해태 타이거즈는 저항의 도시 광주의 슬픔을 승화 시켜준 촉매제였다. 만약 80년대 광주지역에서 해태 타이거즈라는 야구팀이 없었다면 그들은 짓눌린 한으로 인해 분출구를 찾지 못하고 어쩌면 화병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FC 바르셀로나와 해태 타이거즈는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FC 바르셀로나는 13만명에 달하는 소시오라는 서포터즈의 자발적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시민구단이자 민족구단이었다. 우리의 해태 타이거즈는 독점재벌의 돈으로 운영되는 홍보팀이었기에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에는 자사가 생산하는 브랜드의 광고가 덕지덕지 붙어있지만 FC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은 단 한 줄의 광고도 없는 유일한 구단이었다.
이게 FC 바르셀로나와 해태 타이거즈와 같은 점이었으면 또한 다른 점이었다. 두팀은 축구와 야구라는 매개체로 하여 억압받는 민중들의 한을 풀어준 씻김굿 역할을 훌륭히 해낸 순기능이 있기에 오늘날 스포츠가 거대자본과 결합하여 지나친 상업주의 그리고 국가주의를 표방하는 역기능을 표출한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아름답게 비쳐지고 있다.